추석에 파주에 있는 삼릉에 다녀왔다.
예종의 원비 성종의 원비 영조의 후궁 중 한 명을 공릉 영릉 순릉이란 릉으로 보존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일단 사람들이 그닥 많이 찾지 않은 곳이어서 그런지 깨끗하게 잘 관리가 되고 있다는 점에 놀랐고 예종의 원비와 성종의 원비 모두 한명회의 셋째 넷째딸이었다는 데 또 놀랐다.
한명회는 모사꾼 그리고 부관참시로 유명하지만 살아생전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다. 이 사람의 특이점 중 하나가 개국공신과 충신의 후예이면서도 계속 과거에 실패하다가 서른 여덟에 공직에 나섰다는 데 있다.
공직에 나선 이후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면서 많은 정적을 없앴는데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을 거열형으로 제거하고 그의 처와 자식들은 죄다 다 다른 양반집에 노비로 넘겼다는 데 그 잔혹성이 있다.
차라리 그냥 다 죽이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복수했을까? 아마 한명회는 어린나이에 과거에 일찍 급제한 성삼문이 재수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을 죽지도 못한, 가장 비참한 상태로 만든 것이리라.
아무리 죽어 부관참시를 당한들 딸래미들은 십대에 죽어 오백년 넘게 제사상을 받고 있고 초호화묘지에 잠들어있으니 그 얼마나 좋은 팔자이던가.
문득 한명회와 성삼문에 어울리는 그 누군가들이 떠올랐다.
질투 특히 남자의 질투는 가족 모두를 노예로 만들 정도로 무서운 것이리라.
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진실은 영원하다.
왕릉에 다녀온 우울한 깨달음을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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