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8일 월요일

바람불어 좋았던 날

1. 만남
회사생활이 십년이 넘어가다 보니 교육이나 연수를 받게 될라치면 아주 오래전 입사 떄 보고 보지 못한 동료를 볼 떄가 간혹 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친분이 있건 없건 무척 반갑고 지난 세월이 헛된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은 본사에 하루짜리 교육이 있어 잠실 방면으로 출근했다. 줄곧 1호선 라인으로만 출근하다보니 2호선승객들의 비교적 젊은 평균연령(1호선은 출퇴근시간유무를 떠나 노약자가 항상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과 오랜 승차시간이 적응되지 않았다. 하지만 2호선도 신도림역, 사당역, 교대역을 지나고 나면 자리도 앉을 수 있을만큼 그닥 붐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자리에서 십이년 전 함께 교육받았던 직원을 만났다. 이 사람은 십이년 간의 직장생활동안 신장이식 등 투병생활을 이년여간 하고 재혼한 아내와 이를 통해 얻은 세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직원으로 세월의 무게와 투병의 흔적을 보여주듯 외모는 다소 변했지만 그동안 많이 단단해진 마음새로 살아가고 있었다.

회사 얘기 지루한 교육 얘기 사는 얘기... 짦은 만남이었지만 교육시간을 함꼐 하고 점심을 함꼐 들면서 그래도 이 직원 건강이 꽤 나아졌구나... 싶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2. 은밀한 게이샤의 세계
그렇게 지루한 교육을 마치고 평소보단 여유시간이 남아 매달 한번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의 무료일본영화를 보러가기로 했다.
시청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종각역에서 내려 인사동 방향으로 걸어가니 구 허리우드 극장이 보였다.

사당역의 문화학교 서울부터 소격동의 지금은 사라진 아트시네마 장소, 그리고 다시 허리우드 극장...

오랜만에 여길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곳은 총 세 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 중 2관은 아예 실버영화관이라고 하여 좀 오래된 영화를 대상으로 65세 이상 노인들은 2000원을 내고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참... 나이들면 좋은 점도 있구나...

일곱시가 되어 짧은 영화를 봤다.
영화제목은 "은밀한 게이샤의 세계"
소개지엔 핑크영화라고 되어있는데 1972년에 만들어진, 1918~20년대 일본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게이샤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영화는 좀 야하다기보단... 아주 웃겼다.
코믹 에로물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초짜 게이샤가 무사와 첫날밤을 치르고 그와 사귀고 결국 결혼한다.
허나 이 무사는 부업(이라기보단 본업)이 요정운영으로 요정마담, 다른 게이샤들과 수도 없이 난잡한 관계를 즐긴다. 그게 이 사람의 본성이다.
여자는 이것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딱히 막을 방법도 없어 고민하는 내용.
그 중간중간 - 동성애에 빠진 게이샤와 그를 난처하게 바라보는 후배게이샤,
러시아출병을 나가는 이등병과 그를 사랑하는 게이샤와의 우스꽝스러운 관계,
쌀폭동으로 흉흉해진 주변민심...

이런 배경과 인물들이 작품을 채워준다.

이걸 보면서 느낀 건...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던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일본 민중들 역시 쌀폭동으로 고단한 생을 이어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결국 정부는 만주국을 정벌하니마니 시베리아를 통해 러시아를 치겠다고 설치고 다녔지만 실제 일본 대중의 삶은 쌀폭동으로 고단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제국주의자들은 일반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엉뚱한 해외출병으로 그 관심을 돌렸을 수도 있겠고...물론 핍박받은 삶이었다 한들 당시 조선인민들에 비해서는 월등히 풍족한 삶이었겠지만...
당시 일본인들 입장에선 본국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중간관리층이나 학교선생 등으로 조선에 가길 원했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 입장에서도 뭔가 분위기 전환을 통해 식민지배층으로서의 삶을 누릴 하나의 기회였으리라...

3. 추위
영화가 끝나니 여덟시 이십분.
예상보다 영화가 빨리 끝났지만 너무 추워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오랜만에 종로의 밤거리는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었지만... 오전과 오후를 보낸 잠실과 강남 풍경은 수많은 경찰들이 지하철을 지키고 있고 지이십홍보팻말을 붙이고 다니는 학생(또는 주부)들이 너무 많아 좀 생경했다.

뉴스에 보니 지이십으로 얻는 경제적 이익이 무려 450조라고 나오던데... 사백오십조라... 우리나라 육년 정도의 예산과 엇비슷하지 않나? 오늘 전철역 수많은 지이십도우미들을 보니 이들의 고용효과를 보자면 사천오백만원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이틀 회의에 사백오십조원의 효과가 있다는 건 심하게 긍정적인 생각이 아닐까.

건강상의 문제, 거리의 무장경찰을 보면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는 그럭저럭 잘 보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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